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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발 위기’ 국내기업에 위기만은 아니다? 한겨레 | 2012-06-06 21:20:12
[한겨레] 2008년 금융위기 비춰보니

현대차, GM·포드 직격탄에 4년새 미국시장 2배 확장


삼성도 경쟁사 투자 공백 지배력 강화 반사이익 볼수도


대규모 신규사업 기업·대기업 납품 중기엔 '악재' 우려

1920~30년대 대공황 이후 최악의 경제위기였던 2008년 미국발 서브프라임(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위기는 적어도 현대·기아자동차에는 축복이었다. 수십년 동안 세계 자동차 시장을 주름잡던 제너럴모터스(GM)와 포드, 크라이슬러 등 미국 완성차 업계가 금융위기의 직격탄을 맞으면서 주춤하는 틈을 타 시장 지배력을 늘렸다.

금융시장의 안전자산 선호 현상에서 비롯된 유가 급등(고연비차 선호)이나 원화 가치 급락(수출 가격 경쟁력 개선)도 현대·기아차엔 호재 중의 호재였다. 실제로 이 회사는 2008년 위기를 계기로 부쩍 성장했다. 금융위기가 본격화하기 전인 2007년 미국 시장에서 77만2482대를 팔았던 이 회사는 지난해엔 113만1183대를 팔았다. 성장률이 46.4%이다. 시장 점유율도 같은 기간 동안 4.8%에서 8.9%로 갑절 가까이 뛰어올랐다.

2012년 유럽 부채위기에도 현대·기아차의 이러한 성공 방정식이 유효할까. 전문가들은 대체로 긍정적인 전망을 내놓는다. 그동안 유럽 시장은 현대·기아차에 넘어서지 못할 벽과 같은 존재였다. 중국과 북미에 버금가는 큰 시장이지만, 점유율이 5%(지난해 말 기준)에 그친다. 유럽 소비자들이 자국 브랜드에 대한 충성도가 높은데다, 현대·기아가 유럽에선 북미지역에서만큼 현지 생산 체제를 충분히 갖추지 못한 탓이다.

안수웅 엘아이지(LIG)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은 "피아트(이탈리아), 푸조·시트로앵(프랑스) 등 유럽에 근거지를 둔 완성차 업체의 하락세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며 "이런 상황에서 2008년 위기 이후 한층 탄탄해진 현대·기아차의 재무 상황은 이번 부채위기에서 큰 힘을 발휘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위기 이후 사상 최대 실적을 연속 경신하며 쌓아놓은 '실탄'이 현대·기아차의 유럽 시장 지배력 확대에 유효하게 쓰일 것이라는 말이다. 현대차의 현금성 자산은 지난해 말 기준 19조3490억원으로 2007년(5조2732억원)에 견줘 세배 이상 불어나 있다.

유럽 부채위기가 국내 경제에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소득 감소에 따른 산업 수요 축소는 분야를 가리지 않고 기업들의 실적에 영향을 줄 가능성이 농후하다. 하지만 대형 위기는 각 업종·기업에 따라 끼치는 영향이 크게 다르다. 현대차의 사례처럼 경쟁력을 갖춘 일부 재벌 대기업들엔 위기는 기회의 다른 이름이다. 반면 퇴출 위기에 내몰리는 기업들도 속출한다.

메모리반도체와 휴대전화 부문에서 시장 1~2위를 다투는 삼성전자는 2008년 4분기에 1조원에 이르는 적자를 냈다가 3개월 뒤 바로 흑자로 돌아선 데 이어 빠르게 호전된 실적을 거뒀다. 경쟁사인 엘피다나 마이크론 등이 금융위기 덫에 걸려 제때 투자를 못하면서 품질 격차가 크게 벌어졌기 때문이다. 또 환헤지 금융상품을 갖고 있지 않을 정도로 풍부하고 다양한 외환을 보유하고 있던 덕택에 환율 급변동에 따른 환 손실이 삼성전자엔 먼 나라의 이야기였다. 삼성전자 고위 관계자는 유럽 부채위기의 영향에 대해 "리먼 사태(2008년 9월 미국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 파산) 이후 삼성의 경쟁력이 더 강화된 상황이 재현될 수도 있다"고 조심스럽게 전망했다. 그는 "과거 경험과 다른 쪽으로 흘러갈 가능성도 있다"면서도 "우리 경쟁력이 탄탄한 상황이어서 그렇게 나빠질 것은 별로 없다"고 말했다.

세계 조선 1위인 현대중공업도 마찬가지 상황이다. 한때 거세게 추격해왔던 중국 조선업체들이 미국발 금융위기와 공급 과잉 위험으로 구조조정에 들어가면서 현대중공업의 시장 지배력은 더욱 강화됐다. 현대중공업 관계자는 "한때 200개가 넘던 중국 조선사들이 현재 3분의 1까지 줄어들었다"며 "해양플랜트 등 부가가치가 높은 분야에 대한 사업 비중이 확대되면서 후발주자와의 격차는 더 벌어지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반면, 재벌 대기업이라고 하더라도 최근 수년간 신규 사업을 크게 벌여 놓은 쪽은 유럽 부채위기가 공포에 가깝다. 대표적인 분야가 태양광 산업 쪽이다. 지속적으로 대규모 투자가 필요한 장치산업인 탓에 투자 회수 기간도 길다. 이 때문에 이익이 실현되기 전에 대형 위기가 오면 자금 조달에 빨간불이 들어오고 사업 지속성이 타격을 입는다. 한 예로, 2010년부터 태양광 관련 대규모 투자를 진행하고 있는 한화는 공식적으로는 "아직 대책이 필요한 단계는 아니다"라고 밝히고 있으나, 내부적으로는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위기감이 팽배하다. 태양광 진출을 선언했던 엘지(LG)화학과 에스케이(SK)케미칼은 이미 신규 투자를 유보했다.

중소기업 쪽도 불안감을 호소한다. 특히, 대기업과 거래하고 있는 협력사들은 금융위기를 빌미로 대기업들이 비용 전가에 나서지 않을까 우려한다. 2008년 위기 당시 대기업들은 '비상경영', '원가 절감' 등을 내세우며 납품가를 크게 깎았다. 지철호 공정거래위원회 기업협력국장은 "위기 상황을 이용해 납품가를 부당하게 결정하는 걸 막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보고 있다"며 "대·중소기업이 위기 때는 고통을 (전가할 게 아니라) 분담해야 한다"고 말했다. 표한영 중소기업연구원 연구원은 "(정부가) 위기를 빌미로 또다시 성장 중심의 대기업 위주 정책을 평 경우 '동반성장' 흐름이 흔들릴 수 있다"며 "정부와 정치권의 결단에 따라 이번 위기는 우리 경제의 양극화를 부채질할 수도, 동반성장 강화로 나아갈 수도 있다"고 말했다.

김경락 김진철 권오성 이승준 이완 기자
sp9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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